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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야기/건강해지는 상식

골인환 발명자 권재우

과거자료라서 글의 시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해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출처 : 골인제약 주식회사 <골인산> 안내책자

골인환

 

▣ 발명자(양의학에서 효능 입증한 '골인' 개발 민속 의학자)

 

권 재 우 (1931~1998)

 

경남 산청 출생. 민속 의학자.

 

1950년(당시 20세), 축농증 수술 후유증으로 생긴 신경통의 극심한 통증을 잊기 위해 마약인 아편(阿片)을 가까이하게 되자, 아편 중독자가 된 외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 권기환 옹(한의사, 대구 광명당 한약방 운영, 1960년 작고)이 한약재인 부자(附子)를 원료로 조제한 약을 먹은 후 아편중독이 완치됨.

  그러나 자신을 낫게 한 약이 사람의 체질에 따라 치료효과가 다르게 나타남을 안타깝게 여긴 권재우 옹은 수년간 개(犬)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피나는 실험을 한 끝에, 1965년 누구나 복용해도 안전하고 약효가 확실한 해독약 '골인환' 개발에 성공.

 

  '골인(骨仁)'이란 이름은 권재우 옹이 아편에 중독되었을 당시, 마약을 하고 싶다는 유혹이 뼈 속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임을 경험하고, '뼈(骨)'에 사무칠 정도로 참기 어려운 마약의 유혹일 '어질게(仁)' 다스린다는 뜻으로 '골인'이라 이름 함.

 

  그 후 30여 년에 걸쳐, 600여명의 마약중독 환자를 대상으로 1천여 회에 달하는 투약 치료와, 국내외 여러 공인 기관의 임상실험을 통해 골인환의 효과가 입증됨은 물론 한국, 미국, 일본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세계로부터 마약중독치료 특효약으로 인정받음.

 

▣ 마약 해독제 개발 위한 집념의 인생

  지리산 자락이 동쪽으로 내달린 곳에 자리한 경남 산청군은 예로부터 한의학의 뿌리가 깊은 고장이다. 인근에 산 좋고 골 깊은 지리산을 끼고 있어 질 좋은 여러 한약재를 채취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는 점부터가 벌써 벌상치 않다. 이에 걸맞게 민족의학의 의성(醫聖)인 허준 선생이 바로 산청군 신안면 용현마을에서 의업의 도를 닦았고, 그를 길러 낸 유의태 선생 역시 산청군에서 인술을 펼쳤다. 또한 허준의 능력과 인술의 자세를 아낀 스승 유의태가 허준에게 의업의 길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병에 걸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 해부토록 한 곳이 지리산 얼음골이다. 당시 허준 선생은 살신성인한 스승의 거룩한 주검을 해부하여 인체 해부도를 완성한 후, "의원이 되는 길을 결코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겠노라"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산청은 한의학의 고장으로서의 명성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그것은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에 사는 민속의학자 권재우(취재 당시 63세)옹 때문이다. 권 옹은 일찍이 암, 디스크, 간질, 고혈압 등 난치병 치료에 많은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 약재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약 개발에도 남다른 열정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개발한 마약 해독제는 뛰어난 효과가 국내외 유수의 연구기관에 의해 확인돼 지난 1991년에는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는 등 세계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바 있다.

  권 옹을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마당 가득 펴놓은 마약 해독제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마약 해독제를 뼈속까지 맺혔던 독을 어질게 풀어 준다는 뜻에서 「골인」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 마약해독제를 개발하고 그 효능을 인정받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점철되어 있으니, 그가 바쳤던 집념과 눈물은 그의 의술 인생을 극명하게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 세계 유수의 의료기관이 효고 인정

  그가 개발한 골인의 효능을 인정한 의료기관은 서울대 의대와 경북대 의대를 비롯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약치료센터, 이스라엘 마약치료센터 등이다. 이들 의료기관은 임상실험을 거친 결과 기존의 어느 마약중독 치료제보다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판정을 내렸다. 특히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약치료센터는 지난 1989년 임상실험을 통해 만성 코카인 중독자 5명과 헤로인 중독자 4명에게 골인을 투여한 결과, 3~4일의 호전기를 거쳐 5일 만에 마약중독증과 마약에 대한 유혹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알려옴으로써 골인이 세계적 성과를 누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골인에 대한 임상실험 결과를 보고한 각종 연구논문을 종합해 보면, 한결같이 "골인은 마약중독을 근원적으로 해독시켜 주기 때문에 금단기(금단기 :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극심한 고통으로 보통 72시간 내에 생명을 빼앗아간다)의 고통이 경미하다. 뿐만 아니라 습관성이나 부작용과 마약에 대한 유혹심이 전혀 없어 그 예후가 정상인과 같고, 그것도 5일 내외의 투약으로 수십 년간의 만성 마약중독자가 치료되는 획기적인 약제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 전통의학의 위대성을 세계에 알린 금자탑

  이러한 결과는 그동안 마약중독 치료 방법과 비교해 본다면 가히 상상을 초월한 일이라 하겠다. 그간 마약중독자 치료법은 마약 양을 차츰 줄여가는 절감법, 같은 마약인 메사돈으로 대체하는 방법, 항 정신병약인 클로프로마진으로 진정시키는 방법 등이 사용돼 왔다. 그러나 효과가 미미하고 심한 중독 중독 증세와 금단기의 극심한 고통을 해결할 수 없어 치료에 어려움을 겪어 오고 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본다면 골인은 인류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요, 우리 전통의학의 위대성을 세계에 알린 금자탑이라 하겠다.

 

  권 옹이 마약 치료제를 발명하게 된 동기는 그가 대구에 살 때인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인 1950년 3월 평소 앓아 오던 축농증 증세로 경북대 의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수술 후유증으로 심한 관절신경통이 발병하여 그 고통을 잊기 위하여 다급한 마음으로 아편을 입에 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급기야 그는 중증의 마약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 해독 한약먹고 10일 만에 아편중독 벗어

  이때 대구 달성공원 앞 말전골목에서 '광명당'이란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선친 권기환(1960년 작고)씨는 <동의보감> 등 한의서에 실려 있는 마약중독 치료법에 따라 부자는 주성분으로 한 한약처방을 해 주었다. 그는 그 약을 복용하고 10여일 만에 마약중독증에서 해방됐다.

  참고로 권 옹이 들려주는 그의 선친은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는데, 어찌나 완고한지 나라가 망한 마당에 벼슬을 할 수 없다며 고향인 산청으로 낙향하여 은유자적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광복 후 평소 조예가 깊은 한의학의 지식을 살려 대구에 한약방을 냈다. 그의 선친이 특히 잘 고친 병은 신경통과 간장병이었는데, 전국에서 환자가 구름처럼 찾아올 정도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나중에 한약방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인 산청으로 온 후에도 환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인근에 그의 집은 한약방 집으로 통하였다.

  그 당시 의술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아픈 사람에게 보시하는 정신으로 나누어 주는 것으로 지금과는 달리 돈벌이 수단과는 무관하였다. 이런 점은 그의 선친만 그러한 게 아니고 당시 의업에 종사한 모두가 그러했다. 손님들 역시 자신의 형편대로 성의만 표시하고 가면 그만이다. 아주 정답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정경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 자신의 마약중독증 낫고 해독약 개발에 매달려

  당시 부친의 한약방에서 한의학을 공부 중이던 그는, 자신의 마약중독증을 말끔히 씻어 준 부자의 효능에 반해 마약 중독 치료제를 개발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본격적인 임상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전쟁의 와중에서 의약 질서도 없고 변변한 진통제도 없는 터라 아편 남용으로 인한 중독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2년여 동안 환자를 찾아다니며 부친의 방식대로 마약 중독 치료약을 복용시켰다. 그러나 효과가 있는 때도 있었지만, 효과가 없는 때도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부자는 예로부터 임금이 역적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일 때 재료로 썼을 만큼 독성이 강한 약이란 점이었다. 따라서 부자로 마약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부자를 완전히 무독화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광학적인 접근을 해야만 치료 효율이 높은 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때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는 워낙 위험한 약이라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그는 잠을 설쳐 가며 나름대로 부자를 무독화시켜 부지런히 개에게 먹였다. 그리고 개가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부자의 양을 늘려도 보고, 부자 해독제를 준비하여 두었다가 개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에게 실험을 끝내면 마지막으로 직접 먹어봐 인체에 흡수되는 반응 상태를 관찰하였다. 너무 실험을 많이 하다 보니 그때그때 나타나는 미묘한 반응을 다 알 수 있었다. 시행착오로 약을 버리기도 숱하게 하였다.

  이렇게 3년여에 걸친 '개 실험'과 우여곡절 끝에 그는 드디어 부자를 열처리하여 무독화시키는 비법을 터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유황과 운모 등 을 조합하면 약효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6백여 명의 아편중독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해냄으로써, 1962년 무렵에는 그가 개발한 마약 치료제의 효능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 마약 해독제 개발했어도 학위 없다고 무시

  이렇게 1960년대부터 효능을 확인한 골인이, 1991년에 이르러서야 그 효능이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는 등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간판'을 중시하는 세상의 몰이해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연구기관에서도 개발하지 못한 마약 해독제를 박사도 아닌 무명의 산골 민속의학자가 개발해 냈다는 이유만으로 세간에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국 1960년대 이후 골인이 빛을 보기까지 그가 걸오온 30년은 천석꾼 집안의 가산을 탕진하고, 청춘을 모두 바친 집념과 좌절과 설움의 세월이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숱한 냉대도 받고, 미친 사람 취급도 받고 나중엔 지병인 협심증이 도져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도 했다.

  "제 나름대로 임상실험한 결과 골인의 효능에 확신을 갖게 되자, 저는 이를 대중화하여 수많은 마약중독자를 구제하겠 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공인 의료기관의 임상실험을 거치기 위해 지난 1964년에 당시 경북도내 마약중독자 수용 기관인 대구시립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정신과 주치의는 반수경 박사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리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아요 일주일 넘게 반 박사한테 매달린 끝에 천신만고로 허락을 얻어 21명의 마약중독자에게 끝에 그리던 임상 실험을 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 대구시립병원에서 마약중독자 21명 완치

  당시 서른네 살 청년의 집념에 감동, 임상실험을 허락한 반 박사는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그와 사흘 밤을 새워 가며 환자를 관찰했다고 한다. 그런데 환자들이 처음엔 금단증상이 오면 자기들만 죽는다고 약을 안 먹고 뱉어 버렸다. 그는 수용소에서 환자들과 같이 생활하며 금단증상이 오면, 즉시 마약 주사를 놓아주겠다고 설득하고서야 겨우 약을 먹일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끝낸 첫 임상 실험은 만족할 만큼 대성공이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약중독에서 풀려났고, 그는 여기에서 골인이 마약중독 치료에 뛰어난 효과를 지는 약이라는 임상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 앞에는 '한방은 비과학적인 약'이라는 인식의 벽이 높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구시립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임상실험을 마쳤지만, 국내 의학계에서는 그의 성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나 세계에서나 인정받고 제약화하여 세계에 수출하려면, 서울대병원에서 임상실험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66년에 서울대 의대에 재차 임상실험을 의뢰하였다.

  "선친의 친구이던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소개로 서울대 의대 정신과 남명석 과장을 찾아가 한약으로 마약중독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니, 마약중독을 해독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이상자나 하는 소리라고 치부해버리더군요. 그리고 쳐다도 안 보더군요. 아무리 간청해도 상대도 안 해줘 그날은 그냥 돌아왔습니다. 서울역 앞에 여관방을 잡아 놓고 그 이튿날 또 갔습니다. 문 열더니 역시 냉담한 태도였습니다. 그렇게 닷새 동안 매일 찾아가 읍소하니, 할 수 없었는지 의료법상 마약중독자 수용소 이외에서는 마약중독 치료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말해 주더군요."

 

▣ 서울대 의대에서 1백8명 대상 효과 확인

  그는 곧장 보사부(현 보건복지부)로 달려가 담당자를 만났다. 이 좋은 약을 세계가 이용할 수 이게 해야 한다고 수 차례의 탄원 끝에 보사부에서 골인의 임상실험에 관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그 결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1966년 6월 27일에 보사부 장관령으로 임시조치법(보약무1443250055)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서울시경의 협조를 얻어 1백8명의 마약중독자를 검거, 서울대병원에서 임상치료가 이루어졌다.

  "당시 임상실험을 마치고 골인의 효과가 확인되자, 그토록 냉랭했던 남명석 과장이 '이건 한강의 기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극찬을 하더군요."

  당시 직접 실험을 맡았던 김광일(취재 당시 한양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혼미, 환각 등의 마약중독 현상을 치료하는 데 당시 가장 훌륭한 치료제라는 클로프로마진 보다 두 배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약리 작용에 대해 더 밝혀야 할 부분이 있다"고 의학계에 보고하였다. (현대의학 제5권 제14호 1966년 10월)

 

▣ 알코올 · 농약 · 가스중독에도 효과정

  더 밝혀야 할 부분이란 간에서 해독작용을 입증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1만5천분의1 확대 전자현미경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1966년 당시 국내에는 이 현미경이 없었다. 이것을 의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그에게는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보사부의 공청회, 임시조치법의 제정, 시경의 협조, 서울대에서의 임상실험을 거치는데, 권 옹은 당시로는 엄청난 거액인 4천만원을 들여야 했다. 이 때문에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상일 제헌의원 집을 다시 팔았다. 당시 그 집은 대구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저택이었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의 성공적인 임상결과에 힘입어 돈은 아깝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후 골인은 알코올중독(최신의학 제17권 제8호 1974년), 약물중독, 연탄가스중독(중앙의학 제30권 제5호 1976), 농약중독, 식중독에도 효력을 발휘한다는 임상 연구논문이 속속 보고되어 그 성과를 더욱 높였다.

 권 옹의 임상 자료와 논물을 종합하면 알코올 만성 중독자의 경우엔 골인을 30환 정도씩 2~4개월 복용하면 수전증, 장출혈, 지방간이 해소되고, 과음할 경우엔 술을 마시기 전이나 후에 골인을 20~30환 복용하면 과음으로 인한 숙취나 두통이 나타나지 않는데. 약물중독은 급성 중독자에게 1~2주 복용시키면 중독으로 인한 재증상과 후유증이 해소된다. 스테로이드 약물 과용으로 인한 부종도 소멸된다. 연탄가스중독은 골인 3백환을 가루 내어 물에 타서 경구 투입한 결과 15분 후에 회생하고, 이후 후유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농약중독 역시 쥐약을 개에 주어 죽어갈 때 골인 3백 환을 가루 내어 물어 타서 경구 투입한 결과 15분 후 소생되었다 식중독은 발병 30분 이내에 골인을 복용하면 중독으로 인한 위경련, 설사, 두드러기 등이 99퍼센트 치유되고, 24시간 경과 후 복용하면 80퍼센트 치유된다.

 

▣ 비상을 이용한 암약 개발하기도

  한편 1972년 제약회사를 창설하여 골인 상품화에 부분 꿈을 꾸던 그는, 사업 전망이 좋아 회사를 뺏으려는 자본주의 농간 때문에 지병인 협심증이 도져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포기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3년 협심증이 호전되면서 다시 연구를 재개한 그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마약중독 치료제와 병행하여 연구하던 비상이 함유된 암 치료제를 임상실험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복용했는데, 비상의 독이 제거되지 않는 바람에 중독되어 반신불수로 수개월을 지내야 했다.

  "비상약의 치사량을 72배까지 무독화하는 데 성공하여 당시에 암 치료에 사용했는데, 이게 워낙 위험한 약이니까 조제해서 먼저 한 알을 개에게 먹여 보았어요. 그리고 괜찮으면 내가 먹어 보고 난 후에 환자에게 주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너무 바빠 새로 조제한 약을 개한테 안 주고 내가 그냥 먹으니, 지리사같이 묵직한 게 머리를 탁 쳐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비상의 무독화에 실패하여 숨도 못 쉬고 피를 토하던 그는 그의 처가 옆에 있어 골인 여덟 주먹을 입에 넣어 주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한쪽 손에 약간 마비 증상이 있다.

  한편 현재 그는 마약 해독제 개발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암을 비롯한 각종 악성 질환의 치료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비상과 부자를 주장 약으로 하여 암 질환 등을 치료했는데, '용하다'라는 명성과 함께 항상 그의 집에는 환자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때 의사 면허가 없어 경찰서에 고발당하는 일도 있었다. 나중에는 한의사를 두고 서울 구로동에서 한의원을 개업했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 한의사 6명을 데리고 일할 정도였다고 한다. 

 

▣ 후두암 환자 두 달만에 나아

  이러한 정황은 서울 미아리에 사는 배욱현(취재 당시 60세 남자) 씨의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배욱현 씨의 선친은 25년 심한 후두암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나 식사도 못하고 아무리 병원 치료와 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나 권 옹의 약을 두 달간 먹었는데, 후두암 자리가 벌겋게 되고 핑크빛의 피가 땀이 솟아나듯 송글송글 일주일간 돋아나왔다. 그리고 그게 다 나오자 병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의 선친은 후두암이 완치된 후 12년간 더 살다가 72세 때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리고 당시 권 옹에게는 암질환, 간질병, 약물중독 등으로 인한 환자가 많이 찾아왔는데, 신효하게 낫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는 말한다.

  권 옹은 1973년 비상을 먹고 고생한 후로 여태껏 비상 실험을 하지 않았지만, 내년부터는 다시 암이나 난치병의 치료를 위해 비상약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한다.

  "종기에 비상을 가미하면 뛰어난 효과가 있듯이, 암도 종양의 일종이라 부자에 비상을 가미하면 암도 녹아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착안을 가지고 현재 비상을 무독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어요.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생각을 원자력 병원 이광구 박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깜짝 놀라더군요. 이 박사에 의하면 세계보건기구가 이 지구상에 있는 3만여 종의 물질을 분석해 본 결과 암세포를 삭힐 수 있는 것으로 부자, 비상, 소금 간수를 꼽고 있다는 겁니다."

 

▣ 완전 해독력 입증위해 모든 재산 바쳐

  어쨌든 비상을 먹고 쓰러졌던 권 옹은 끈질긴 투병 의지로 다시 일어서 이번에는 골인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즉 1975년 5월에 당시 경북대 의대 정신과 이시영(취재 당시 고려병원장) 박사가 1만5천분의 1 전자현미경을 새로이 도입하자, 이를 이용해 골인의 마약중독 치료 효과가 일시적인 정온작용이 아니라 간에서 해독작용의 결과란 걸 입증하기 위해 매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가족의 반대라는 새로운 벽에 부딪혀야 했다.

  "의약 실험을 한다고, 또 제약회사를 차려 골인을 상품화한다고, 천석꾼 집안의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심지어는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일이 생기자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식구 모두가 쌍수를 듣고 반대하는 거였습니다. 한의원을 운영하면 먹고는 살 수 있으니 제발 모든 일을 그만두라는 종용을 수 없이 받았어요."

  사실 이때 그는 임상 실험비 등으로 모든 재산을 연기처럼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사글세 방으로 전전하던 처지였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의약 실험에 미쳐 가산을 탕진한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의약 실험비를 조달하려고 친지들에게 부탁했지만, 이미 식구들이 그가 반쯤 미친 사람이란 이유를 달아 돈을 대주지 말라고 부탁을 한 뒤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골인의 가치를 규명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서울에서 6명의 한의사를 두고 개업했던 한의원을 팔아서 겨우 자금 융통을 하였다.

 

▣ 일시적 정온작용이 아닌 완전 해독작용 입증

  그렇게 어렵사리 당시 경북대 의대 정신과 이시영 박사에게 임상 실험을 부탁한 그는 골인의 마약중독 치료 효능은 약물을 해독시키는 리보좀이 증가한 간세포의 해독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통지를 받음으로써 그의 집념의 결실을 끝내 이루었다.

  이렇게 독성 실험 자료와 임상 실험 자료를 꾸준히 축적해 나가면서 제약 기업의 꿈을 꾸던 그는 가족들의 반대가 누르러지면서 골인의 상품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규 교육을 받은 한의사인 둘째 아들 철현씨가 그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찰스앤드루 마약센터 등에 골인을 보내 5명의 코카인중독 환자와 4명의 헤로인중독 환자를 완치시켰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어 이스라엘 마약센터도 같은 내용의 골인 치료 효과를 인정했고, 파키스탄 의사도 직접 내한하여 골인을 가져가 임상실험한 결과 같은 효과를 얻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현재 산청군 향리에서 영세한 시설로 약을 제조 중인 그는 지난 1991년 9월에 경북대 의대 신경정신고 강병조 교수에게 그간의 골인에 대한 종합 임상 보고서 작성을 의뢰, 세계보건기구에 보냈다. 그리고 1991년 12월 11일에는 한 촌로가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국내에 체류하는 1백 5개국 외국 공관 직원과, 내외신 기자들을 초청하여 학술 발표회를 가졌다. 30년의 집념 끝에 골인을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그는 그가 비공식적으로 3천7백여명에게 이 약을 복용케 해 광명을 찾아 주었고, 공식적으로도 1백50명에게 이 약을 복용케 해 새 삶을 찾아 주었다. 특히 1991년 종합 임상 발표 후 전국의 마약중독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전국의 경찰도 마약사범을 검거하면 그에게 보내어 마약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있다.

 

▣ 마약중독 방지를 위한 공익사업 구상

  한편 골인이 세계에 알려지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들이 조제비법을 거액에 사겠다고 하고, 미국의 제약회사들도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그것은 앞으로 골인을 공익적 차원에서 인류에게 공급하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권 옹은 앞으로 미국 각지의 마약중독자 1백50명을 대상으로 임상 실험을 하여 완벽하게 골인의 효과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후, 재단법인 '세계마약방지협회복지재단'(가칭)을 발족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마약방지협회와 연계하는 한편, 각국의 자선단체와 복지재단의 보조를 받아 마약중독자에게 무료로 골인을 공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태리, 캐나다 그리고 유엔 사무국과 접촉하여 예비 작업 중인데 망국병을 퇴치하겠다는 그의 뜻에 공감하여 모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 부자, 유황, 운모, 백반 등의 재료로 만들어

  현재 그가 만들고 있는 골인의 자연 약재료는 열처리하여 무독화시킨 부자(4mg)와 유황(400mg), 운모(20mg), 백반, 규산염 등이다. 여기에 그가 밝히지 않은 자연 약재 몇 가지가 더 들어간다.

  이것을 그의 선친이 만든 마약 해독제와 비교해 보면, 선친의 것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낫는 데 비해 그의 것은 고통 없이 속히 낫는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특히 치사량이 4mg인 부자를 열처리하여 무독화시킨 것이 그간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비법이라 한다. 그 결과 1966년 6월 1일 서울대 약대 생약 교실에서 임상 실험한 바에 의하면 60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진 사람이 한 번에 골인 9백그램까지 먹어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현재 권 옹은 마약중독 치료뿐만 아니라 디스크와 관절염치료에도 능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고 있다. 그는 디스크와 관절염 환자에게 골인과 경면주사로 만든 만치환과, 자연 약재를 만든 재생탕을 처방해 주고 있다.

 

▣ 디스크, 관절염 치료에도 능해

  "디스크와 관절염 치료도 약 중의 군자인 부자에 비법 있어요. 부자를 혼합해서 약재를 투여하면 신경계통이 되살아나고 연골조직도 복원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부자를 무독화하여 다량으로 인체에 투여하느냐 하는 것이죠."

  권 옹은 결핵성 관절염의 경우 부자 치사량의 7배까지 투여하면 연골이 재생되고, 마디마디가 붓는 류머티스 관절염은 치사량의 10배까지는 투약해야 되고, 만성화된 관절염 환자는 치사량의 10배까지 투약해야 된다고 한다. 다만 지나치게 만성화되어 뼈가 기형으로 틀어지고, 연골조직이 망가져 합병증이 있는 건 자신도 고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의 약을 먹으면 디스크나 관절염 환자 중에 20퍼센트 정도는 일종의 명현현상을 동반한다. 명현현상은 약을 투여한 후 한동안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인데, 권 옹의 설명에 따르면 명현현상을 보이는 사람일수록 치료 효과가 좋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명현현상이 오면 전화해서 막 욕을 합니다. 병이 낫기는커녕 더 아프다느니, 사기꾼이 아니냐고 그럽니다. 명현현상은 대개 한 달 이내에 오나, 80퍼센트 정도는 명현현상이 없이 서서히 좋아져요."

  다라서 그는 디스크, 관절염도 마약 중독 못지않게 완벽한 치료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 취재 기간 중에 그의 처방대로 하여 디스크, 관절염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전북 군산 나운동의 신상래(취재 당시 36세 남자) 씨

2년 전 무거운 짐을 들다 허리가 삐끗한 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다. 그간 약도 많이 먹고 침도 맞았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현재 권 옹의 약을 3개월째 먹고 있는데, 그전처럼 허리에 찌릿한 것도 없어지고 손을 짚지 않고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

◐ 경남 산청군 원지면의 민정호(취재 당시 35세 남자) 씨

그의 올해 67세 된 장모가 3년 전에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그 뒤로 허리가 앞으로 60도 정도 굽어져 제대로 눕지도 못했다. 재작년 여름에 권 옹의 약을 한 달간 들게 했더니 지금은 제대로 누워도 고통이 없다고 한다. 

◐ 진주도립병원 뒤에서 추어탕 집을 운영하는 50대 여인

그녀는 집을 짓다 높은 데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평소 다리를 절뚝거리고 허리가 아파 늘 굽히고 있었는데, 3개월째 권 옹의 약을 먹은 지금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통증이 많이 없어졌다.

 

  권 옹의 마약중독과 디스크, 관절염, 그 밖의 난치병 치료에 주장약으로 쓰는 비방인 부자는 예로부터 천오, 초호와 함께 한방에서는 3대 극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따라서 과용하면 생명을 잃는 위험한 약성이 있으므로 웬만한 한의사들은 사용을 꺼린다. 만약 사용한다면 부자를 물에 담가 뻣뻣한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우려서 검은콩과 감초 달인 물에 넣고 속이 익을 때까지 끓여 말려서 사용했고, 그것도 아주 극소량씩 썼다. 그럼에도 그가 다량의 부자를 사용할 수 있는 건 각고의 노력 끝에 부자의 무독화에 성공했기 때문임은 두말한 필요가 없겠다.

  "의서에 인삼과 녹용은 선약(善藥)이고, 부자는 난치병 약이며 약의 군왕(君王)이란 구절이 있어요. 한의사들은 부자를 잘 다스릴 줄 알아야만 진짜 명의라 합니다. 이는 부자가 약성이 뛰어난 반면, 독성이 매우 강해 잘못 쓰면 환자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환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어명에 해당하는 살생지권(殺生之權)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잘만 다스리면 다른 약을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 부자는 약 중의 군왕

  권 옹은 이제 또 다른 의학혁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약을 이용한 질병 치료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즉 마약중독자에게는 병이 없고, 다만 생활의 문란으로 인한 영양실조나 폐병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껏 숱한 마약중독자를 치료해 왔는데, 그들이 원래 있었던 병의 고통을 잊으려고 마약을 복용하던 중 어느 사이엔가 모르게 원래 있었던 병은 나아 버린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고 한다. 심지어는 암까지도 마약 복용 중 2~3년 내에 나은 경우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 이유를 즐거움 속에서는 큰 병이 없고, 큰 병이 있다손 치더라도 즐거움 속에서 지내면 인체의 자연치유력에 의해 병이 호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약은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향상시킬 만큼 환락을 주는 특성을 지닌 약이란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약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또 다른 의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것은 마약해독제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며 또 한 번 노익장의 의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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